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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RANGE SPECIAL
세월이 바뀌고 사람과 기술도 바뀌지만
그들만의 사운드는 영원할 것이다
나그라 브랜드 스토리
탄생 과정
스테판 쿠델스키(Stefan Kudelski)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폴란드 사람이다. 어린 시절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나치와 소련의 침략을 피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스위스였다. 종전 후 그가 학업을 마친 곳은 스위스 로잔에 있는 스위스 연방 기술 연구소로, 오늘날 유럽의 MIT라 불리우는 로잔 공대이다.
이곳에서 대학 시절동안 프로젝트로 아날로그 테이프 레코더를 만들었으며 그것이 이후 상업화가 되며 직접 회사를 세우고 레코더 업계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나그라의 시작이었고, 최초의 제품인 Nagra I 이라는 테이프 레코더였다. 이것이 1952년의 일이다. ‘나그라’라는 말은 폴란드 말로 ‘기록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 나그라 시리즈의 창시자, 스테판 쿠델스키(Stefan Kudelski)
이후 나그라는 Nagra I을 시작으로 II, III, IV 등의 다양한 일련의 아날로그 레코딩 시스템을 내놓았으며 이 녹음 장치들은 모두 방송 및 음향 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의 제품으로 군림하게 된다. 최초의 제품부터 시작된 매력적인 디자인과 작은 크기 그리고 다양한 기능 등은 나그라의 전매 특허였고, 단순히 방송이나 음향 관련 업계 뿐만 아니라 군사 관련 분야에서도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후 나그라는 방송 업계에서 탁월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음향 레코딩 뿐만 아니라 영상 관련 분야의 시스템 개발에서도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날로그 시절부터 디지털 시대에 이어 현재의 네트워크 스트리밍 시대까지도 방송, 통신, 보안 등의 여러 영역에서 신호 처리와 고도의 정보 보안 시스템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은 나그라라는 하나의 회사가 아닌 쿠델스키 그룹 산하의 각종 사업 부문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그라 오디오의 시작
▲ 나그라에서 30년 넘게 엔지니어로 지낸 "장 끌로드 슐럽"
그가 나그라 최초의 하이파이 기기인 PL-P를 들고 있다.
소리와 관련된 기술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정작 홈 오디오 기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나그라 최초의 홈 오디오가 데뷔를 한 것은 1997년의 일이다. 사실 나그라가 홈 오디오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애초부터 큰 기대와 기획을 갖고 시작된 것은 아니다.
나그라가 오디오를 시작하게 된 것은 크게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수 많은 거래처에서 오디오 기기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에 기획이 되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90년대 말, 당시 나그라의 영업 담당자가 한국을 방문 했을 당시, 오디오 기기를 론칭하게 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의 답에 따르면 나그라의 녹음 기기에 담긴 기술들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나그라다운 오디오 기기에 대한 제안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나그라에서 30년 넘게 엔지니어로 일생을 보낸 오랜 엔지니어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회사의 배려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 끌로드 슐럽이다. 그는 나그라에서 일생을 바친 엔지니어로 그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보내는 차원에서 스테판 쿠델스키가 그에게 회사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그는 나그라 오디오를 만들고 싶다는 답을 내놓으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나그라의 하이파이 시스템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 중 설득력은 후자가 훨씬 높다. 그 이유는 실제로 나그라의 대다수 제품들이 슐럽에 의해 모두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 나그라 프리앰프 PL-P
그렇게 하여 최초의 나그라 하이파이 오디오 기기로 등장한 것이 1997년 발매된 프리앰프 PL-P이다. 진공관으로 설계된 이 프리앰프는 기존의 나그라 레코더와 같은, 작은 알루미늄 네모 상자에 진공관으로 설계된 아날로그 라인 프리앰프와 포노 앰프를 함께 내장한 제품이었다. 무엇보다도 나그라 오디오의 등장에 큰 인상을 심어준 이 제품의 매력은 디자인에 있었다. 나그라 레코더를 모티브로 한 제품답게 전면에는 ‘모듈로미터’라는 바늘이 움직이는 미터기가 장착되어 사운드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여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아름답게 풀어냈다. 작지만 다채로운 컨트롤 노브가 주는 조작감과 미터기가 주는 아날로그 감성은 많은 오디오파일들을 끌어 당기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 앰프에는 진공관으로 설계된 간결하면서도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만듦새의 내부 회로는 나그라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고 전원부 또한 배터리 방식으로 충전하여 사용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포노 앰프를 위해 MC 카트리지를 위한 승압 트랜스포머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 꽤나 특별했다. 아주 작은 2개의 트랜스포머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프리앰프에 내장된 작은 트랜스포머는 하나의 나그라의 이미지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실제로 나그라가 직접 제작하여 탑재하는 이 트랜스포머 부품은 포노 앰프 뿐만 아니라 밸런스드 회로 설계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PL-P의 등장은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존의 덩치크고 물량 투입을 중시하는 하이엔드들이 즐비한 가운데, 나그라의 아이덴티티가 살아있는 작고 이쁜 프리앰프는 굉장히 남달라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크기와 상관없이, 이 프리앰프가 들려준 따뜻하고 중독성 높은 음악성이 가득한 사운드는 나그라라는 이름을 하이엔드 홈 오디오에서 단번에 갖고 싶은 제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발전을 거듭하다
▲ 나그라 모노 블럭 파워 앰프 VPA
정확히 1년 뒤, 나그라는 PL-P 프리앰프에 짝을 이루는 모노 블럭 파워 앰프를 내놓게 된다. 바로 나그라 오디오 사상 최고의 명작, VPA 다. 845관을 출력관으로 선택하여 설계된 이 모노 블럭 파워 앰프는 네거티브 피드백이 없는 Class A 방식의 푸시풀 3극관 파워 앰프였다. 타 업체들의 육중한 대형 진공관 파워 앰프들과 달리 매우 슬림하고 세로로 세워 놓는 방식의 단아하면서도 이쁜 VPA는 프리앰프와 마찬가지로 전면에 모듈로미터를 장착하여 앰프의 출력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듈로미터를 이용해서 출력관을 교체할 경우, 앰프의 바이어스를 맞출 수도 있는 기능도 제공했다. 작지만 세로로 세워 놓는 디자인 덕분에 내부에는 덩치가 꽤 큰 토로이덜 타입의 트랜스포머가 2개나 들어있다.
하나는 메인 전원용 트랜스포머이고 다른 하나는 출력 트랜스포머였다. 이를 통해 Class A 방식의 50w 출력을 제공했는데, 수치는 50w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대형 스피커를 울리는 데에 거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여유있는 파워를 구사했다. 단순히 Class A와 50w 파워라는 방식과 수치를 떠나, 이 앰프가 들려준 찰지고 미려한 사운드는 PL-P가 그랬던 것처럼 나그라만의 독특한 사운드 아이덴티티를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당시 울리기 만만치 않던 윌슨 오디오의 와트퍼피 5.1 이나 와트퍼피 6를 울리는 베스트 앰프로 불리울 정도로 대단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
VPA는 나그라가 내놓은 모델 중 가장 긴 생명력과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한 모델로, 초기 발매 이후 오디오파일들의 요청에 따라 몇가지 버전 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2002년 이후 발매된 제품들에는 입력 단자에 XLR 이외에 WBT의 RCA 단자로 구성된 언밸런스 입력이 추가되었다. 또한 출력관은 일반 모델은 나그라가 직접 테스트를 하여 업선한 슈광의 선별관을 사용했지만, 후일에는 스페셜 에디션으로 KR의 최고급 845을 사용한 고급 버전이 한시적으로 별도 발매되기도 했다. 2010년 이후 최종 단종이 결정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애호가들이 중고로도 찾고 있는 베스트셀러 모델이 바로 이 VPA다.
▲ 나그라 파워앰프 MPA
VPA 이후 나그라는 진공관이 아닌 반도체 기반의 또 다른 파워 앰프를 내놓게 되는데, 오늘날 나그라 파워 앰프의 토대가 된 MPA가 그것이다. 1999년 발매된 MPA는 MOS-FET Power Amplifier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이름으로, 바이폴라 트랜지스터 대신 MOS-FET을 출력소자로 선택하여 설계한 제품이다. Class A의 진공관 모노 블럭모델인 VPA와 달리 MPA는 처음부터 스테레오 파워 앰프로 설계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VPA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빅타워 컴퓨터 형태의 섀시에 나그라의 트레이드 마크인 모듈로미터를 전면에 장착하고 있었는데, 앰프를 세워서 사용할 수도 있고, 눕혀서 일반 앰프 같은 형태로도 사용이 가능한 앰프였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별도의 옵션 보드는 추가하면 파워 앰프에서 인티앰프로도 변형이 가능한 모델이었다.
이처럼 나그라가 자랑하는 기능성이 가미된 설계의 이 앰프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전원부에 있었다. 작고 뛰어난 음질을 자랑하는 레코더 제작에 오랜 역사와 기술을 쌓아온 나그라는 스위칭 전원부 회로 기술에 대한 큰 자부심이 있었다. 이 MPA 파워 앰프의 전원부는 그러한 나그라 만의 특별한 스위칭 모드 전원부가 탑재되었고, 앰프는 MOS-FET 기반의 Class AB 회로로 완성되었다. 이 전원부는 단순히 스위칭 전원이라 특별했다기 보다는 여기에 Power Factor Collector 라는 전원부의 역률, 소위 전압과 전류의 이상적인 전송 특성을 구현하는 회로가 더해져 기존의 스위칭 전원들과 달리 깨끗하고 안정적이며 월활한 전류 공급이 가능한 전원부가 탑재되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출력에 비해 앰프에 커다란 방열판 같은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설계를 자랑했다. 대신 내부에는 팬이 추가되었고 앰프 전면부에는 팬의 바람을 밖으로 빼내는 배기구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 오디오파일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 설계나 방식은 기존 나그라 제품들과 달랐지만 사운드는 여전히 나그라의 독특한 사운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었다.
▲ 나그라 프리앰프 PL-L
처음 아이디어대로 하나의 앰프 시스템을 완성한 나그라는 2001년에 두번째 프리앰프인 PL-L을 내놓게 된다. 최초의 모델이자 포노 앰프가 내장된 PL-P와 달리 두번째 모델인 PL-L은 포노 앰프를 제거한 순수 라인 프리앰프로 등장한 첫 제품이다. 3~4년에 걸친 오디오파일들의 피드백에 맞춰 그다지 요구가 많지 않은 포노 앰프를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신 오디오파일들이 요구한 밸런스드 입력과 출력이 갖춰진 프리앰프에 대한 요청에 대응한 것이 바로 PL-L 이다. 따라서, 전작에 비해 내부 회로는 다소 줄어들었고, PL-P에서 사용했던 배터리도 제거되었다. 대신 전원부는 나그라가 자랑하는 자체 스위칭 모드 전원부를 사용했으며 밸런스드 회로를 위해 나그라의 자랑거리가 되는 소형 트랜스포머가 좌,우 출력단에 하나씩 추가되어 밸런스드 모드에 대응하도록 만든 점이 이 앰프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 이외의 부분들은 오리지널 PL-P와 동일했다.
디지털로 진출하다
▲ 2003년에 출시된 나그라 DAC
2003년에는 나그라 DAC를 내놓았다. 나그라 오디오 기기들 중 최초의 디지털 기기가 바로 이 제품이다. 당시에 나그라에는 디지털 레코딩이 가능한 레코더는 있었지만, DAC가 단품으로 나온 것은 없었다. 사실상 이 제품은 하이파이용 기기라기 보다는 프로 시장에 대응한 제품에 가까웠다. 기본 DAC 회로는 2채널 스테레오로 설계되었지만, 옵션을 추가하여 6채널 내지는 8채널까지 확장 가능한 구조의 DAC 였다. DAC 와 아날로그 회로는 자체 설계한 반면, 디지털 필터와 디지털 회로는 CH Precision의 전신인 애너그램 테크놀로지의 DSP 모듈을 공급받아 만든 공동 개발 제품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소개되지 못했다.
2005년에는 최초의 반도체 파워 앰프인 MPA의 후속 모델인 PMA, PSA가 등장했다. 이 두 모델은 피라미드 모노 블럭 파워 앰프, 피라미드 스테레오 앰프의 이니셜로, 이름처럼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했다. 바로 피라미드 구조의 디자인이었다. 전례가 없는 형태의 디자인은 다시 한번 나그라 디자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단지 외관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6년만에 등장한 이 반도체 앰프는 전작 MPA의 기술을 상당 부분 개선하여 한층 업그레이드된 회로로 성능과 사운드를 대폭적으로 향상시켰다. 개선점은 크게 두가지였다.
▲ 나그라 파워앰프 PMA & PSA (둘 다 외관상 차이는 없다)
첫째는 전원부다. 전작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 역률 개선 회로인 PFC 회로가 완전히 새롭게 설계되었다. 덕분에 전원을 타고 외부에서 유입되는 노이즈를 차단시키고 빠르고 안정적으로 넉넉한 전원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두번째는 출력 소자의 교체다. 이때부터 나그라의 반도체 파워 앰프들은 영국 Exicon이 만드는 MOS-FET를 출력 소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FET 소자는 골드문트의 Talos 시리즈를 비롯하여 유수의 하이엔드 업체들이 FET로 출력 회로를 설계할 때 사용하는, 현재 가장 선호도가 높은 하이엔드 앰프용 출력 소자이다. 이를 통해 전작인 MPA보다 파워풀 하면서도 발열이 적고 나그라다운 아름다운 사운드를 내는 반도체 앰프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현재 발매되는 나그라의 파워 앰프들의 대다수 기술들이 여기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드디어 전체 시스템을 완성짓는 나그라의 첫 소스 기기가 탄생한다. 바로 CD 플레이어들이 등장한 것이다. 나그라의 CD 플레이어는 3가지 모델로 출시되었다. 모두 같은 필립스의 CD-PRO2M 픽업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하되, 순수한 트랜스포트 기능의 CDT, 아날로그 출력까지 제공되는 CDP 그리고 프리앰프 기능으로 볼륨 컨트롤까지 가능한 CDC가 그것이다. 이들 CD 플레이어들가 오디오파일들에게 크게 호평 받은 이유는 두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아름다운 메커니즘 디자인이다. 인공위성이나 항공 우주 분야에서 사용한다는 모터 메커니즘을 사용한 트랜스포트의 로더는 버튼 눌러 오픈하는 순간 마치 고도화된 첨단 기계 장비를 사용하는 느낌을 준다. 듣기에 기분 좋은 모터 소리와 함께 로더가 전면으로 배출되며 CD를 올려 놓는 바닥면에는 플레이어 내부에서 쏴주는 붉은 LED의 불빛이 화려함을 더해준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조작감은 절대로 다른 오디오 기기에서 맛보기 힘든 매력적인 즐거움이다.
▲ 나그라가 2007년에 출시한 세 가지 CDP 중 하나인 "나그라 CDC"
그리고 이 CD 플레이어들이 호평받는 두번째 이유는 디지털 회로의 사운드에 있다. 과거 나그라 DAC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CD 플레이어들에도 애너그램 모듈의 DSP로 만든 비동기식 업샘플러와 버브라운의 192kHz/24bit DAC 칩이 하나의 모듈로 설계되어 핵심 엔진으로 사용되었다. 모든 신호는 358.6kHz/24bit 신호로 변환되어 매우 정밀하고 투명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나그라 색채의 사운드로 CD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이 CD 시리즈는 롱런 중에 있다.
이후 나그라는 한 동안 특별한 신제품보다는 주로 녹음과 관련 레코딩용 마이크와 레코더 기기들이 주된 사업으로 유지되고 오디오 사업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2012년 나그라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창업자이자 쿠델스키 그룹의 대표였던 스테판 쿠델스키가 사망한 것이다. 그의 사망 이후 쿠델스키 그룹의 여러 회사들의 지분 정리에 들어갔고, 나그라도 내부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지금까지 나그라라는 커다란 기업의 간판 아래 있던 오디오 사업 부문도 정리의 수순에 들어가게 되었다.
쿠델스키의 자녀들 중 이 오디오 사업을 물려받을 적자가 나타나지 않자, 나그라 오디오 사업에 큰 역할을 맡았던 영업 담당 이사인 마티유 라투르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오디오 사업 부문을 인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쿠델스키의 딸인 마거릿 쿠델스키가 오디오 사업 부문을 맡게 되며 새로운 회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나그라라는 회사에서 분리시켜 ‘스위스 오디오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이름의 오디오 회사를 설립하여 나그라에 있던 오디오 사업 부문을 분리 독립 시켰다. 제품들에 대해 브랜드명인 나그라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되 회사는 독립된 오디오 업체가 된 것이다.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다
▲ 나그라의 엔지니어 필립 샴봉(Philippe Chambon)
새로 설립된 스위스 오디오 테크놀로지는 나그라에서 분리되면서 나그라 오디오 사업의 산파이자 사업을 진행해왔던 장 클로드 슐럽이 고문의 역할로 이 회사에 참여하고, 나그라에 있던 일부 엔지니어들이 스위스 오디오 테크놀로지에 합류하게 된다. 슐럽은 나이도 있고 이미 은퇴한 엔지니어이기에 새로운 나그라 오디오를 이끌어가기에는 어려웠다. 따라서, 젊은 엔지니어들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오디오 엔지니어링을 책임질 엔지니어링 디렉터가 필요했고 외부에서 새로운 인재를 영입, 그 자리를 채웠다. 그가 바로 필립 샴봉(Philippe Chambon)이다. 라디오 관련 방송국와 방송 기기를 설계해온 엔지니어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평소 어릴적부터 음악과 오디오에 조예가 깊었고 그런 경력과 사운드에 대한 철학이 맞아 나그라의 새로운 엔지니어링 디렉터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의 합류와 함께 나그라 오디오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 15년 동안 유지되었던 제품들에 대한 새로운 설계가 시도되며 전제품의 라인업이 새롭게 재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필립 샴봉이 주도한 새로운 제품들은 프리앰프부터 시작되었다. 2013년 등장한 프리앰프 Jazz와 이듬해 등장한 Melody가 그것이다. 15년 만에 다시 설계된 새 프리앰프는 전작인 PL-P나 PL-L과 달리 일반 프리앰프와 같은 뒷면에 모든 입출력 단자들이 배치된 하이파이 제품의 형태로 바뀌었다. 앰프의 크기와 전면의 모듈로미터 같은 나그라의 전매 특허 디자인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기능적인 부분과 진공관과 반도체로 설계된 내부 회로들은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되었다. 15년 만에 등장한 이들 앰프들은 전작에 비해 현격히 향상된 해상도와 투명도, 스테이징 능력으로 일신된 나그라의 사운드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나그라 고유의 매력적인 온도감과 질감 그리고 유려한 음악성은 변함없이 살아있었다.
▲ 나그라 프리앰프 Jazz
▲ 나그라 스테레오 파워앰프 MSA
바뀐 것은 프리앰프 뿐만이 아니었다. 반도체 파워 앰프의 전작인 PMA와 PSA를 단종시키고 그 자리에 MSA라는 새로운 스테레오 파워 앰프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작과 달리 앰프의 방열판이 바닥이 아닌 상판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다소 나그라답지 않은 묘한 디자인으로 바뀌며 나그라 팬들에게는 약간의 호불호가 갈리는 디자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나그라의 기본이 되던 모듈로미터 디자인과 스위치 전원은 전작에서 그대로 물려받았고, Class AB의 회로 구조로 그대로 였다. 하지만, 전원부와 회로의 세부적인 설계에는 상당한 변화가 가해졌다. 메인 전원부로 리니어 방식의 토로이덜 트랜스포머 및 콘덴서가 추가되고 그 뒤에 역률을 보정하는 PFC 기능의 스위칭 전원이 뒤를 잇는 구조로 전원부가 교체되었다. 새로운 전원 회로의 개정과 함께 앰프 회로에도 세세한 개선이 더해지고 앰프의 기능성에 있어서도 스테레오 모드와 모노 브릿지 모드를 선택할 수 있는 기능등이 추가되어 앰프를 스테레오 모드와 모노 블럭 모드 중 선택하여 원하는 사양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사운드의 개선과 나그라 만의 색깔은 변함없이 살아있었다.
한편 진공관 앰프로는 처음으로 300B를 사용한 앰프가 등장했다. 소출력의 300B 파워 앰프와 외부 입력 모듈이 추가된 300B 인티앰프가 진공관 앰프로 추가되었다. 아날로그 앰프들의 전면적인 재구축을 시작한 새로운 나그라는 본격적인 새 회사인 스위스 오디오 테크놀로지가 만든 제품들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프로젝트는 바로 DAC였다. 이미 2003년에 DAC를 내놓기는 했었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디지털 오디오 업계에서 보기에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제품이나 나름없었다. 필립 샴봉은 새로운 DAC를 위해 과거 플로리언 코시와 티에리 히브가 주도했던 애너그램 플랫폼을 버리고 대신 플레이백 디자인스로 유명한 또 다른 스위스 디지털의 거두, 안드레아 코흐를 프로젝트 엔지니어로 영입했다.
▲ 나그라 HD-DAC
그에게 설계를 맡겨 최신예 DAC 설계를 시도한 것이다. 모든 디지털 회로는 안드레아 코흐가, 그 외의 전원부와 아날로그 출력단은 필립 샴봉 본인이 직접 설계하는 방식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년 여에 걸친 개발 끝에 2015년 나그라 역사상 최고의 DAC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HD-DAC이다. 이 DAC는 안드레아 코흐가 설계한 디지털 필터와 DAC회로가 FPGA로 제작되어 하나의 모듈로 탑재되었고, 나그라 특유의 소신호용 트랜스포머와 엄청난 크기의 대형 콘덴서들 그리고 진공관 아날로그 출력회로가 어우러져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안드레아 코흐의 전매 특허나 다름없는 아날로그에 가까운 사운드를 내는 DSD 재생과 나그라의 미음이 만나 환상적인 디지털 오디오의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HD-DAC의 완성이후 새로운 플래그십 파워 앰프 설계에 도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2016년 발매된 현재의 플래그십 모델 HD-AMP이다. 지금까지의 나그라 제품들에서 볼 수 없던 엄청난 크기의 섀시 규모와 함께 나그라답지 않은 거한 물량 투입 그리고 비약적으로 강력해진 출력과 몬스터급에 걸맞은 스펙까지. 외형적인 면에서는 VPA 모노 블록의 디자인을 그대로 채용하되 반도체 설계와 몬스터급의 이미지를 담아낸 진정한 의미의 플래그십 파워 앰프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규모가 커진 만큼 속에 담겨진 내용물 또한 몬스터급이다. 무게만 18kg 이나 되는 1,600w급 토로이덜 트랜스포머를 시작으로 300,000uF의 문도르프 콘덴서가 전원을 책임진다. 앰프 회로는 MOS-FET 기반의 출력 트랜지스터를 통해 VPA와 같은 3극관 동작에 가장 흡사한 파워 앰프 회로를 완성했다. 기본은 30w까지 Class A로 동작하되 그 이상의 출력으로 넘어가면 Class AB로 전환되고 채널당 8옴 기준 250w에서 최저 임피던스 동작시 최대 1,000w의 출력을 쏟아낸다. 나그라라는 이름값 그리고 플래그십 다운 제품 등급에 맞춰 가격 또한 억대를 호가하는 엄청난 가격으로 나그라의 새로운 표준을 열었다.
나그라 오디오의 현재와 미래
▲ 풀레인지에서도 리뷰된 적 있는 제품 "나그라 Classic DAC & INT"
현재 나그라는 제품의 등급을 크게 2개로 분리하고 있다. HD-DAC와 HD-AMP로 구성된 초하이엔드 플래그십 시리즈인 HD 시리즈가 있고, 기존 나그라 제품들을 대체하는 Classic 시리즈가 새로운 나그라 시리즈로 등장하는 중이다. 201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나그라의 새로운 Classic 시리즈는 플래그십 HD 시리즈의 기술들을 그대로 물려받되, 소위 트리클-다운 방식의 기술 전이를 통해 플래그십의 성능과 사운드를 기존 나그라 제품들로 이식시킨 제품들이 된다. 그 시작으로 Classic AMP와 Classic DAC가 등장했고, 곧 Classic AMP와 짝을 이루는 Classic PRE가 등장할 예정이다.
1997년부터 시작된 나그라의 하이파이 오디오는 20년을 맞이하며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엔지니어에 의해 다시 태어난 나그라는 신제품과 한층 아름답게 변신한 나그라 사운드로 2017년을 열게 되었다. 분명 사람도 바뀌고 기술도 훌륭해졌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나그라 사운드라는 그들의 철학이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필립 샴봉이라는 새로운 엔지니어가 이끄는 젊은 엔지니어링 팀이 오늘날의 나그라를 만들고 있지만 여전히 제품 개발의 근간은 그들의 귀에서 출발하고 있다. 부품의 선별은 수 십가지의 엄선된 부품들을 일일이 리스닝 테스트를 통해 선택하고, 치밀하게 개발된 회로 설계의 마지막은 다시 슐럽과 샴봉 두 사람이 참여한 리스닝 테스트에 의해 끊임없이 튜닝을 거쳐 완성되고 있다. 과거의 전통과 철학에 새로운 첨단 기술과 아이디어가 멋지게 하나로 합쳐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나그라 오디오 제품들에서 느끼는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음악적인 사운드는 나그라에 빠져들게 만드는 전매 특허이다. 세월이 바뀌고 사람과 기술도 바뀌었지만, 나그라가 갖는 그들만의 사운드는 앞으로도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