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링크
본문
골드문트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VS 포칼 유토피아
*부제 : 헤드폰에 2억 4천의 소스를 넣는다면 9억 8천의 스피커 시스템과 경합
글.사진 : 루릭 ( luric.co.kr , @LuricKR )
똘기 충만한 프로젝트의 시작
저는 제품 리뷰는 할 수 있지만 직접 뭔가 기획을 하거나 ‘미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지정된 환경 속에서 하나의 제품을 분석해왔을 뿐, 여러 종류의 제품을 조합해보거나 다른 것과 비교하는 시도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아마존으로 옮겨갔지만, 슈퍼카를 가지고 온갖 기행(?)을 일삼던 제레미, 제임스, 리처드 삼총사의 BBC 탑 기어(Top Gear)를 보면서 늘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들이 별별 희한한 프로젝트를 다 해볼 수 있었던 이유는 BBC에서 슈퍼카 대여 시 발생하는 엄청난 보험료와 제품 구매 비용 및 각종 지출을 모두 지원해줬기 때문입니다. 스폰서와 팀이 있어야만 레이싱 드라이버가 서킷을 달릴 수 있는 것처럼, 진짜 화끈한 뭔가를 해보려면 충분한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가진 것이라고는 귀와 경험 밖에 없는 저에게 놀라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헤드폰에게 온갖 제품들을 다 투입해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온갖 제품을 구입할 수가 없으니 오디오 수입사에서 온갖 제품들을 사용하게 해주겠답니다. 당연히 컨텐츠 작성은 제 마음대로 합니다. 글의 방향도 일반 제품 리뷰와는 다릅니다. 특정 제품을 상세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프로젝트에서 얻은 경험을 흥미롭게 서술하면 됩니다. 오디오 수입사에서 ‘아, 이거 좀 재미있겠다!’라고 생각나는 기획이 있으면 그 기획에 필요한 제품과 청취 공간 등을 모두 준비해주며, 저는 현장에 가서 경험하고 글만 씁니다.
그렇습니다. 몇 편이나 연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완전히 똘기 충만한 주제로 글을 쓸 수 있게 됐습니다. 글 속에 등장하는 제품에 대한 홍보 효과는 분명히 있겠지만 글의 목적은 제품 홍보가 아닙니다. 어지간해서는 우리가 해볼 수 없는 ‘희한한 짓’을 한 번 진짜로 해보자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는 1회의 주제가 그렇습니다.
1. 포칼 유토피아 헤드폰에 골드문트 헤드폰 앰프와 골드문트 CD 플레이어를 연결.
2. 그것을 골드문트의 최상급 스피커 시스템과 실시간 비교 청취.
포칼 유토피아(Focal Utopia)! 550만원이나 하는 헤드폰인데 몇 대씩 들여오는대로 즉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토피아 유저 여러분이 소스 쪽에는 얼마나 돈을 투자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유토피아에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넘사벽 수준의 소스를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 여기에서 멈춘다면 재미가 별로 없지요! 내킨 김에 최고의 소스를 넣은 포칼 유토피아를 들고 골드문트 플래그쉽 스토어로 가서, 골드문트 스피커 중에서 최상급의 모델과 비교 청취를 해봅시다. 그 뭐냐... 박물관에 전시됐다는... 전 세계에 25대만 있다는... 6억 5천만원짜리 아폴로그 애니버서리(Apologue Anniversary)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포칼 유토피아에게는 헤드폰 앰프로 1,270만원의 텔로스 헤드폰 앰프 2를 끼우고, 2억 3천만원의 레퍼런스 블루 MK3 CD 플레이어를 살짝쿵 연결해보았습니다.
스피커 : Goldmund Apologue Anniversary (6억 5천만원, 총 25대 생산)
프리앰프 : Goldmund Mimesis 32.5 (1억원)
CD 플레이어 : Goldmund Reference Blue MK 3 (2억 3천만원)
*포칼 유토피아 헤드폰 시스템 구성
CD 플레이어 : Reference Blue MK 3 (2억 3천만원)
DAC 내장형 헤드폰 앰프 : THA 2 (1,270만원)
헤드폰 : 포칼 유토피아 (550만원)
“550만원짜리 헤드폰이 저렴하게 느껴지는 마법.”
이번 기획의 주제에는 재미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논리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국내의 헤드파이 시장에서 하나의 잃어버린 퍼즐 조각 같았던 ‘소스의 고급화’를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헤드폰에는 원래 한계가 있으며, 시스템을 갖춘다면 헤드폰을 가장 비싼 것으로 하고 소스는 PC에 연결하는 외장 DAC 겸 헤드폰 앰프 정도면 괜찮으리라 예상하십니다. 저 또한 그런 고정 관념이 있었고요. 심지어 CD 트랜스포트, DDC, DAC, 아날로그 헤드폰 앰프 등으로 모든 요소를 분리해서 구축하는 헤드폰 매니아조차도 각 제품의 고급화를 시도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 돈으로 라우드 스피커의 하이파이 오디오를 만드는 게 더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일반적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고급 시스템을 구성한 후 헤드폰의 구동과 비교 청취를 해보겠습니다.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에서 라우드 스피커 대신 헤드폰을 사용하는 셈입니다. 휴대용 DAP와 외장 DAC 겸 헤드폰 앰프들도 하이엔드 헤드폰의 잠재력을 뽑아낼 수 있으나, 만약 하이퍼 레벨의 하이파이 소스 기기들을 연결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더 좋은 소리가 나오겠지만 도대체 얼마나 더 좋은 소리가 나올 것인가? - 지금부터 답을 찾아봅시다.
어차피 가격은 실감나지 않으니 소리만 즐겁게 들어본다
- 골드문트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레퍼런스 블루 MK3, 미메시스 32.5 -
포칼 유토피아는 예전에 몇 주씩이나 청취해보았으니 청취 경험이 거의 없는 골드문트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시스템을 먼저 감상해보았습니다. 범접할 수 없는 가격대라서 긴장하거나 경이로움을 가지고 청취하게 될 것 같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억대의 가격은 저의 개념을 초월해버렸기 때문에 체감이 되지 않으며(0이 많은 숫자로 보일 뿐), 시스템의 소리도 처음에는 낯설기만 해서 충분히 받아들여 봐야만 제 맛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청취의 시작부터 끝까지 안면 가득 미소를 짓게 된 점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새 페라리를 뽑아서 운전을 해보면 오감 충족 때문에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겠지요?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시스템의 총 견적이 페라리 F12 베를리네타 2대의 가격입니다.
*참고 : 특정 제품의 상세한 후기를 작성한다면 2주 정도 제품을 곁에 두고 사용해보면서 글을 쓰지만 이번 후기는 두 가지 다른 시스템의 비교 청취 경험을 전하기 위한 것이므로 첫 청취의 결과가 가장 명료할 확률이 높습니다. 라우드 스피커와 헤드폰을 계속 감상하므로 청각이 지치기 쉬우니 10~15분 정도씩 간격을 두며 감상했습니다. 그래도 3시간이 흐르자 귀가 먹먹해서 안 되겠더군요. 오케스트라의 단원을 뽑기 위해 오디션을 진행하는 지휘자 또는 매니저는 얼마나 힘들지 잠시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오디션의 가장 마지막 차례로 뽑힌 지원자가 얼마나 불쌍한지도 알게 됐음)
*참고 : 볼륨 세팅은 제가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 dB 측정 앱으로 70~80dB가 나오도록 했습니다. 90dB를 적정 볼륨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정 볼륨은 청취 공간의 면적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며, 이 정도의 룸에서 헤드폰이 아닌 라우드 스피커 시스템을 스마트폰 마이크로 측정하여 90dB가 될 정도면 몇 분만 들어도 청각이 지쳐버릴 것입니다.
“2억 3천만원짜리 CD 플레이어인데 제품 사용은 상당히 까다롭고 불편하며 곡 넘어갈 때 튀는 소리도 있다.
단, CD 재생을 정지하거나 음반을 꺼냈다가 다시 넣어도 곡의 듣던 부분을 이어서 듣게 해주는 점은 좋다.”
“매장의 골드문트 기기들은 각별한 관리를 받고 있으며 골드 플레이트의 파란색 필름도 떼어내지 않은 상태였다. 사진 속의 CD 플레이어와 인티앰프 금 딱지가 푸르딩딩한 이유가 그것이다. 시스템 가격이 너무나 높다 보니 많은 주의가 필요한데, 그래서 본인이 시스템 청취를 하는 동안 뒤쪽 테이블에 골드문트 스토어 직원이 대기하면서 커넥터 전환을 해주었다.”
룸 튜닝이 매우 잘 되어 있습니다. 흡음 처리가 강하게 되어서 소리가 라이브하게 흩어지지 않으며, 알맞은 코너의 반사 처리로 넓은 방 전체가 스피커의 소리로 채워집니다. 방이 하나의 사운드 큐브가 되는 셈입니다. 전방의 좌우 스피커 사이로 마치 홀로그램처럼 악기와 가수의 이미지가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앉아있는 자리의 좌우와 뒤쪽에도 현장의 공기가 채워집니다. 레코딩 룸 안에서 녹음되고 스튜디오 느낌으로 마스터링된 음반은 청취 공간이 스튜디오로 느껴지고, 콘서트홀 안에서 다수의 마이크로 녹음되어 입체감 있게 마스터링된 음반은 청취 공간이 그대로 콘서트홀이 됩니다.
소리만 들어봐도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의 인클로저와 프레임 디자인이 공진 제어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초저음이 바닥에 깔리되 뚜렷한 레이어를 형성하며 기체처럼 흩어지는 일이 없군요. 아날로그 오디오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구름처럼 형성되는 초저음을 원할 수 있겠으나 골드문트 최상급 시스템의 초저음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질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액체 또는 고체에 가깝습니다.
텔로스 헤드폰 앰프 2를 사용할 때에도 느낀 점인데, 골드문트에는 달콤한 맛의 고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고음을 달콤하다고 느끼는 것에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색이 밝거나 다른 쪽으로 왜곡되어서 달콤하다는 것이 아니라, 고음이 실로 정밀하게 완성될 때 청각적 만족감이 달콤함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의 고음은 나노미터 단위로 조합된 초고밀도의 회로 같습니다. 누락되거나 튀는 부분 없이 정확히 맞춰진 고음의 입자가 청취자의 귀로 도달하는 음파가 되어 전달될 때, 그 음파의 높은 완성도와 충실함으로 인해 달콤한 만족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점은 여러 음악을 듣기 전에 심벌즈의 챙하는 소리 한 번만 들어봐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의 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매우 깊게 느낀 점은 '소리의 초점이 극히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대한 라우드 스피커 시스템에서는 소리의 해상도보다는 바닥에 낮게 깔리는 저음과 굵직한 선의 고.중음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는데, 아폴로그 애니버서리는 라우드 스피커에서도 초고해상도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몇 미터 정도로 떨어진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악기가 제 앞에 존재하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집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이 스피커의 진면목은 소리를 깨끗한 홀로그램으로 변환한다는 점입니다. 소리를 본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뚜렷한 소리 초점은 음반 속에 담긴 각 요소의 거리와 깊이 묘사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라우드 스피커로 감상할 때면 소리 초점이 잘 맞은 경우 악기들이 좌우 사이에 한 줄로 나란히 서있으며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시스템에서는 방향은 물론 거리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2D 홀로그램이 아니라 고해상도의 3D 홀로그램인 것입니다.
사람의 시각이 오디오 감상에 상당한 심리적 영향을 줍니다. 오디오 감상을 할 때 눈을 감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눈을 감아서 스피커의 모습을 지우면 현재의 오디오 시스템이 만드는 소리 홀로그램을 머리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시스템은 스피커가 사라지고 오케스트라와 밴드, 가수가 내 앞에 현존한다는 '인식'을 주었습니다. 이 경험을 목표로 해서 많은 오디오 애호가들이 돈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골드문트의 소리는 음악 녹음 현장의 앰비언트까지 모두 전달하는 초고음을 중시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사람의 가청 영역은 삐익하는 단음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기운'으로 감지하는 초고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테스트로 검증되지 않을 뿐이지요. 초고음의 명료한 재생은 20kHz를 넘어서 48kHz 정도만 넘어도 청취자에게 현장의 공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날로그 오디오의 노이즈가 음악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주장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골드문트의 디지털 오디오에서는 녹음 당시의 현장에서 나오는 그 분위기 - 악기와 공간 모두에서 나오는 작은 앰비언트 노이즈들까지 모두 재생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입니다.
제가 방에서 헤드폰으로 감상해오던 CD 음반들을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시스템에서 재생하면서 계속 느꼈던 점이 그것입니다. 저는 음반 속에 담겨 있던 현장의 공기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악기와 악기의 소리가 겹치면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공기'가 제 호흡기로 들어오는 듯 합니다. 청취실의 대형 공기 청정기와 에어컨으로 시원한 공기가 채워져 있지만 저는 스피커의 소리를 들으며 다른 방향으로 숨이 탁 트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큰일이군요. 이제 다른 오디오 시스템의 소리를 들을 때 숨이 막힐까 봐 걱정 중입니다.
포칼 유토피아의 잠재력은 어디까지일까
- 골드문트 레퍼런스 블루 MK3, 텔로스 헤드폰 앰프 2, 포칼 유토피아 -
그러면 이번에는 최고의 소스를 넣은 포칼 유토피아의 소리를 들어봅시다. 골드문트 레퍼런스 블루 MK3에서 CD 음반을 재생하며 텔로스 헤드폰 앰프 2를 연결하고 포칼 유토피아 헤드폰으로 감상하는 구성입니다. 550만원의 헤드폰을 위해 2억 4천만원을 투입하는 시스템이지요.
혹시 모르실까봐 설명을 드리면, 골드문트 텔로스 헤드폰 앰프 2에는 바이노럴 모드가 있습니다. Siegfried Linkwitz의 저서 "Improved Headphone Listening"에 의거하여 제작된 바이노럴 모드라고 하는데요. PCM이든 DSD든 상관없이 항상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이며, 디지털 입력 상태는 물론 아날로그 입력에서도 동작합니다. (아날로그 입력도 제품 내부의 ADC를 거쳐 디지털 시그널 프로세싱을 하기 때문) 텔로스 헤드폰 앰프 2의 바이노럴 모드를 선택하면 방에서 라우드 스피커 한 조로 음악을 들을 때처럼 좌우 채널의 소리가 혼합되는 영역이 헤드폰 속에서 생성됩니다. 문제는,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시스템으로 현란한 경험을 하고 나니 텔로스 헤드폰 앰프 2의 스탠더드 모드를 아예 쓸 수 없게 됐다는 겁니다. 바이노럴 모드가 아니면 라우드 스피커의 감흥과 비교를 해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청취에서는 바이노럴 모드로만 포칼 유토피아를 감상했습니다.
*참고 : 이번 기획이 가능했던 이유는 골드문트 수입사측에서 포칼 유토피아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놀라서' 저에게 전화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이엔드의 라우드 스피커 시스템만 청취하며 헤드폰은 아무리 비싼 제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유토피아는 확연히 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폴로그 청취실에 골드문트 헤드폰 앰프 2와 유토피아를 두고 비교 청취를 해보니 '헤드폰에서 라우드 스피커의 감흥을 느낄 수 있구나'라는 발견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놀라운 경험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골드문트 플래그쉽 스토어로 초대 받았습니다.
‘해상도의 엄청난 상승’이 첫 인상입니다. 포칼 유토피아는 젠하이저 HDVD800에서도 1080p 수준의 고해상도를 제공했지만 이번 골드문트 시스템에서는 4K 이상의 해상도를 전달합니다. 소리가 극히 투명해졌는데, 예전에 제가 ‘스위스제 디지로그 사운드’라고 표현했던 텔로스 헤드폰 앰프 2의 독특한 고음 처리가 훌륭한 CD 플레이어의 영향을 받으면서 순도 99.999999%의 투명함으로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순수한 투명함을 유토피아가 거의 그대로 통과시켜서 청취자의 귀로 전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예전에 들었던 유토피아의 소리는 고음보다 중저음의 비중이 높게 들렸는데 이번 시스템에서는 고음의 비중이 더 높아지면서 전체적 균형이 좋아졌습니다. 초저음이 강조되어 낮게 깔리는 것은 동일하며 웅장한 감흥 속에서 악기들의 음을 모두 상세하게 묘사하는 능력이 크게 증폭됐습니다.
포칼 유토피아는 원래 응답 속도가 빠르고 잔향이 거의 없는 소리를 들려주지만 이번 시스템에서는 잔향이 아예 없습니다. 완벽한 진공 상태에서 음반에 담긴 소리와 공기만 그대로 전달됩니다. 거의 최상급의 소스를 넣자 포칼 유토피아는 앞서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스피커가 그러했던 것처럼 뚜렷한 소리 홀로그램을 남기면서 사라져버립니다. 머리 아래쪽으로 매우 낮게 깔리는 초저음도 경악할 수준입니다. 풀 사이즈 헤드폰 중에는 저음의 초점이 머리 뒤쪽으로 가는 제품도 있는데 유토피아는 머리 아래쪽으로 깔립니다. 유토피아의 초저음 재생력은 저음 악기들의 동시 연주가 시작되면 해일처럼 밀려오는 저음의 위용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번 시스템에서는 해일처럼 밀려올 뿐만 아니라 파도가 떨어진 후 굽이쳐서 다시 올라오는 끓어오름이 느껴집니다. 이로써 저음의 연주에서도 형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저음은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높은 저음의 타격과 초저음의 울림이 유연하고도 정확하게 이동하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저음의 움직임을 헤드폰이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진짜 하이엔드 소스를 받은 유토피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게다가 아찔한 스릴까지 더해서 표현합니다.
텔로스 헤드폰 앰프2의 바이노럴 모드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점도 명확히 느꼈습니다. 소리의 불필요한 흩어짐이나 병합 현상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라우드 스피커의 공간감만 더해주는 바이노럴 모드입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음상이 머리 양옆과 앞쪽 근처로도 형성됩니다. 이 소리를 매일 듣는다면 지금의 저처럼 놀라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매일 들을 때마다 만족스러운 놀라움을 잔잔하게 계속 경험하시리라 예상합니다.
맙소사! 여태껏 많은 독자들과 유사한 수준의 시스템을 유지한다는 핑계로 미들급의 헤드파이 소스 기기를 사용해왔는데, 진정한 하이엔드 소스를 넣으면 완전히 다른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진정한 하이엔드 소스를 헤드폰 리뷰의 기준점으로 삼으면 대부분의 헤드폰들이 좋게만 들리거나 모두 수준 이하로 들리는 이분법적 판단을 하게 된다고 짐작했습니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진정한 하이엔드 소스와 미들급 소스 기기를 모두 갖추는 것이겠지만 그 정도의 시스템을 갖춘 헤드파이 리뷰어가 존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저는 운이 좋아서 총 견적 2억 4천만원의 소스 기기를 포칼 유토피아에 연결한 후 총 견적 9억 8천만원의 골드문트 오디오와 비교 청취할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미들급 소스 기기를 사용하며 헤드폰 감상을 할 텐데, 이번 경험으로 받은 충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하이퍼급 하이파이 오디오 VS 하이엔드 소스를 받은 헤드폰
- 비교 청취 결과는?
동일한 CD 음반을 다시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시스템으로 청취합니다. 번스타인 지휘의 말러 5번 1악장과 3악장입니다. 진짜 놀라움과 재미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정말로 초특급 하이엔드 오디오와 헤드폰 시스템이 경쟁할 수 있는가? 사실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이번 글을 쓸 이유도 없었겠지요. 이 정도의 재미를 느껴본 것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시스템과 포칼 유토피아 헤드폰은 일단 음색 차이가 뚜렷하게 있으며, 몇 가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줬습니다.
첫째, 뚜렷한 소리의 홀로그램을 만들어냅니다. 둘 다 스피커, 헤드폰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음반 속의 악기와 공기만 전달됩니다. 단, 아폴로그 애니버서리는 3D 개념으로 악기의 위치와 거리까지 모두 전달하지만 유토피아는 훨씬 작은 3D 홀로그램을 저의 머리 주변으로 만들어줍니다. 이 느낌은 소리가 나오는 스피커와 청취자 귀 사이의 물리적 거리 때문에 발생하는 모양입니다.
둘째, 둘 다 초저음의 굽이치는 형상을 볼 수 있으며, 바닥으로 낮게 깔리되 기체처럼 흩어지지 않고 액체나 고체처럼 명확한 레이어를 만듭니다. 이 점은 자못 충격적인 것으로, 유토피아 헤드폰의 저음 재생력이 기존 헤드폰들을 크게 뛰어넘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저음의 해일과 더불어 끓어오르는 듯한 굽이침을 경험하려면 유토피아에게 최고의 소스를 넣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포칼 유토피아 쪽의 음색이 조금 더 밝게 느껴집니다. 둘 다 무색무취의 투명한 고음을 재생하지만 둘을 직접 비교 청취해보면 아폴로그의 고음이 더 진하고 굵은 선을 지녔으며, 유토피아는 가느다란 선으로 화려하게 흔들리는 연한 하늘색의 고음을 들려주었습니다.
넷째, 아폴로그 애니버서리로 들을 때는 현장의 앰비언트와 공기가 자연스럽게 살아나지만 유토피아로 들을 때는 음악 자체만 뚜렷하게 들립니다. 유토피아의 초고음 재생 능력 덕분에 앰비언트가 재생되고 있으나 앞서 언급한 '소리 홀로그램'의 사이즈가 훨씬 작아서 잘 감지되지 않는 듯 합니다. 라우드 스피커 시스템에서는 청취 공간이 또 다른 스피커 역할을 하기 때문에 헤드폰에서는 배제되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 듯 모든 면에서 라우드 스피커 시스템 쪽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헤드폰 시스템이 유리한 점도 하나 있습니다. 니어 필드 리스닝(Near field listening)입니다. 음악을 분석적으로 들을 때 고성능의 헤드폰은 효과적인 ‘소리 확대경’이 됩니다. 포칼 유토피아는 라우드 스피커의 느낌을 만들 뿐만 아니라 소리를 깨끗하게 정제하여 귀에 가깝게 들려줍니다. 단, 스튜디오 헤드폰처럼 소리 자체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 공간을 함께 소환한다는 점이 유토피아의 특징입니다.
진정한 하이엔드급으로 오면 오디오 감상에서 귀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게 됩니다. 높은 해상도와 뚜렷한 사운드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 면도 있지만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와 유토피아는 모두 각 음역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하이파이 오디오를 듣다가 헤드폰으로 바꾸면 사실 이 점에서 실망하기 쉽지요. (반대로 말하면 헤드폰만 청취하다가 제대로 된 하이파이 오디오를 들으면 격차를 경험하게 됨) 라우드 스피커로 들을 때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소리가 헤드폰으로 오면서 뭔가 인위적이거나 특정 음역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포칼 유토피아로 바꾸면 그러한 어색함이 없습니다. 예전에 포칼 그랜드 유토피아 EM과 유토피아 헤드폰을 비교 청취할 때도 느낀 점으로, 유토피아는 헤드폰이면서도 하이엔드 라우드 스피커의 자연스러운 음 연결을 해냅니다. 단, 그랜드 유토피아와 유토피아는 음색이 닮아 있었고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와 유토피아는 서로 다릅니다.
이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요소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굳이 설명을 더 해본다면,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와 유토피아 모두 낮은 고음이 부각되지 않으며 높은 저음의 타격이 넘치지 않도록 잘 조율된 듯 합니다. 이렇게 하면 대단히 선명한 소리라도 오래 감상할 때 귀가 지치지 않게 됩니다. 사실 저도 골드문트의 사운드는 고음이 센 편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오디오쇼 현장에서 너무 큰 소리로 틀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아주 조용한 청취 공간에서 70~80dB 볼륨으로 감상하니(이 정도 볼륨도 상당히 큰 소리로, 아파트에서 이렇게 틀면 항의 들어옴)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의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으며 어느새 청각과 일체화 되었습니다. 포칼 유토피아도 세밀한 고음과 웅장한 저음을 재생하면서도 청각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튜닝된 헤드폰으로 보입니다. 쉽게 말하면 듣기 편한 소리의 헤드폰인데 초고음이 그대로 전달되며 음색이 화사하고 저음이 꿈틀거린다고 하겠습니다.
*이번의 희한한 짓으로 얻은 결론은?
1) 골드문트 아폴로그 애니버서리의 소리를 진득하게 들어보니 끝내주게 좋긴 좋더라.
2) 포칼 유토피아에 2억 4천짜리 소스를 넣었더니 완전히 다른 헤드폰으로 탈바꿈하더라.
3) 헤드폰도 진짜 잘 만들고 고급 소스를 넣어주면 라우드 스피커 못지 않게 감동적이다.
4) 그래도 역시 라우드 스피커 시스템이 더 좋다.
5) 정신적 피해가 있으므로 넘사벽 오디오 시스템의 경험은 안 하는 편이 좋다.
*이 컨텐츠는 오디오갤러리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컨텐츠는 제 마음대로 작성되었습니다. 다른 리뷰도 그렇지만 좋은 제품을 접하고 글을 쓸 때는 눈치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