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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롭게 즐기는 실버 루나 프리스티지의 매력
Fezz Audio Silver Luna Integrated Amplifier
글 & 그림 : 하이파이클럽 / 이종학
지금부터 몇 년 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동쪽으로 가면 벨로루시 접경 지역에 있는 크지즈노라는 곳에서, 한 남자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평생을 바쳐서 일궈온 사업에 일대 전환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만든 회사는 각종 오디오 부품, 스피커 인클로저, 전원 트랜스 등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램피제이터, 마이텍과 같은 하이엔드 회사에 공급할 정도로 성능면에서도 인정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에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출력 트랜스에 대한 평이 분분했다. 토로이달 타입으로 만든 이 트랜스는,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진공관 앰프로 꾸미기엔 여러 고안이 필요한 터였다. 그러므로 그간 거래해온 회사들에서 난색을 표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어렵게 만든 출력 트랜스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살리느냐? 그런데 제품 퀄리티로 말하면, 세상에 난다긴다 하는 메이커들에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대로 사장시키기엔 여기에 바친 정성과 노력이 아깝기만 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결론은 단 하나. 이 출력 트랜스를 살릴 수 있게, 아예 진공관 앰프를 만드는 것이다. 단, 통상은 출력관의 성능과 스펙에 따라 제품을 설계하는 방식에서 탈피해서, 이 출력 트랜스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설계를 하자.
이런 결단을 내린 이면에는, 2010년부터 서서히 폴란드를 위시한 동구권 국가들의 오디오 씬이 심상치 않았던 점도 있다. 즉, 그간 서구쪽 오디오에 잠식당했던 이들 제국(諸國)에서 이제는 우리 기술로, 우리의 감성을 담은 앰프와 스피커를 만들자, 라는 붐이 조성된 것이다. 하긴 그런 유행 덕분에 그의 회사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자, 그럼 그 회사가 뭐냐? 바로 토로이디(Toroidy)라는 브랜드다. 일종의 패밀리 기업으로, 창업자는 레크(Lech)라는 분이고, 두 아들 마티아스와 토마스가 함께 작업하고 있다. 그간 다양한 실험과 연구, 경영 센스 등이 어우러져, 심지어 스피커 인클로저의 도장까지 실시할 수 있는 공장까지 만들었다. 저 위대한 라코프스키(Lachowski) 가문의 업적이 이곳 크지즈노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앰프를 직접 만들겠다는 발상은 나중에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다음의 두 가지 포부를 충분히 반영한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로 퀄리티. 일단 다른 회사의 일급 제품에 못지 않은 퍼포먼스를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로 가격. 아무튼 아무리 구두쇠라고 해도 선뜻 지갑을 열 수 있는 가격적인 메리트를 확보해야 한다.
이래서 EL34를 출력관으로 써서, 푸시풀 방식으로 만든 실버 루나(Silver Luna)가 데뷔한 무대는 2015년 11월, 바르샤바에서 열린 폴리쉬 오디오 쇼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표했다. 아니 어떻게 이 퀄리티에 이 가격이 나올 수 있을까? 아마 중국이나 제3국에 OEM을 주지 않았을까? 뭐,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이미 크지즈노에 터를 닦아놓은 페즈(Fezz) 오디오는, 풍부한 가용 인력과 기술력, 장비 등을 확보한 상태다. 여기에 진공관 인티 앰프 정도 추가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만일 처음에 그냥 진공관 앰프를 만들겠다고 출발했다면 도저히 이런 가격표를 매길 수 없다. 이 점에서 페즈의 경쟁력은 여타 진공관 앰프 메이커를 압도하는 측면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런 가격대를 유지하기 위해, 페즈 오디오가 최신의 마켓팅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각각의 서비스를 별도로 유료화해서, 오로지 필요한 기능만 구입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를테면 리모콘, 오토 바이어스, 홈 씨어터 모듈, 진공관 커버 등이 모두 선택 사항이다. 이중에 오로지 필요한 것만 별도로 구매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로우 버짓 항공사들이 도입하는 기법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또 항공사뿐 아니라 여러 부문에서 이런 컨셉이 응용되고 있다. 즉, 무조건 가격만 싸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체 자체에 충분한 물량 투입과 정성을 기울이되, 부가 항목을 일률적으로 제공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맡겨두자는 것이다. 이 부분은 향후 많은 오디오 업체들이 참고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채 2년도 안 되는 시기에 페즈 오디오는 무섭게 치고 올라가고 있다. 올해엔 뮌헨 하이엔드 쇼에까지 입성해서, 동구권을 벗어나 서구와 아시아권까지 그 가치를 알리는 중이다. 비교적 빠르게 우리나라에 온 것은, 요즘 침체된 오디오 시장을 생각하면 상당한 행운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직접 음을 듣고, 가격표를 확인하고 나면, 아무리 쫀쫀하고, 까다로운 분들이라도 선뜻 신용 카드를 꺼내들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모델은, 데뷔작 실버 루나에서 업데이트된 버전이다. 정식 이름은 실버 루나 프리스티지. 대체 뭐가 바뀌었느냐 궁금할 터인데,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초단/드라이브단 역할을 하는 관의 교체가 가능해졌다. 즉, 12AX7과 6N2P 중 본인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단, 교체 시엔 앰프의 전원을 끈 다음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를 지키지 않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본 기를 구입하면 12AX7과 6N2P가 함께 제공이 된다. 비교 청취 후 본인의 감각에 맞게 고르면 된다.
둘째는 토글 스위치의 제공. 이를 통해 펜토드/테트로드 선택이 가능해졌다. 이 경우엔 음악을 듣는 와중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 미세한 변화가 때로는 큰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번 시청은 이 두 가지 개량 포인트를 점검하는 쪽으로 진행이 되었다. 즉, 12AX7과 6N2P를 교체해서 듣되, 그 각각에 펜토드 또는 테트로드 모드로 전환해서 체크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총 4회에 걸친 시청이 이뤄진 셈이다. 이 부분은 말미의 시청평에 자세히 기술하도록 하겠다.
한편 본 기의 구성을 보면, 2개의 12AX7/6N2P가 보인다. 이 경우, 진공관 앰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초단관이겠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진공관 파워의 경우, 출력관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별도의 관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실제로 이것은 쌍삼극관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정확히 하나의 관에 두 개의 삼극관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를 갖고 스테레오 구성을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하나는 초단관, 또 하나는 드라이브관 역할을 하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그럼 잠깐 두 개의 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마치 냉전 시대로 돌아간 듯, 이들 관의 출생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미국 또 하나는 소련. 게다가 하나는 오디오용으로, 또 하나는 군용으로 개발이 되었다. 태생지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다. 그러나 지금은 실버 루나 프리스티지에서 만나 자웅을 겨루는 상황이 되었다. 참, 흥미롭지 않은가?
우선 6N2P를 보자. 이것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5751이라는 관이 나온다. 군사용이다. 1950년대에 이를 개량하기 위해 몇 가지 관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인 것이다. 필라멘트 2개를 병렬한 구조로, 그 때문에 정확하게 전압과 전류를 공급해줘야 한다. 즉, 6.3Volt/340mA 사양이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의 음악성을 발견한 것은 의외로 대중음악계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러시아의 레드 베어라는 회사가 기타 앰프용으로 6N2P를 넣은 것이다. 이에 주목한 것은 바로 전설적인 기타 메이커 깁슨. 과감히 이 회사가 레드 베어의 배급권을 따내면서 널리 뿌린 덕분에, 6N2P의 잠재력이 여기저기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2AX7의 아성에 강한 도전장을 내는 위치에까지 오른 것이다.
한편 12AX7은, 당초 RCA에서 1947년에 정식 출원되었다. 그 전신을 추적하다보면 AM 라디오용이라는 용도가 나온다. 태생부터가 오디오용인 것이다. 또 필라멘트를 직렬로 구성한 덕분에, 전압과 전류를 걸 때 아무래도 넉넉하다. 약간의 여유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12AX7은 특히 전단에 많이 쓰이는 바, 12AT7, 12AU7, 12AV7 등 다양한 방계 가족군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범용성이 높다 하겠다.
이렇게 일별해보면 6N2P는 공산주의 시스템 하에서 철두철미, 정확성을 요구하는 군수용으로 나온 반면, 12AX7은 자유주의의 물결 하에서 음악을 즐기기 위한 오디오용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성격이 정확히 음에 반영된 것도 사실이다.
단, 아무래도 본 기 실버 루나 프리스티지가 구 소련의 영향 하에 있었고, 실제 사용하는 출력관도 러시아제인지라, 6N2P의 존재는 좀 각별한 면도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면, 두 관의 선택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 본격 시청에 들어가 보자. 참고로 시청에 사용한 것은 룬(Roon)을 이용, 오렌더의 W20을 통해 웨이버사의 DAC3T(진공관)에 연결한 것을 소스기기로 활용했고, 스피커는 아발론의 트랜센던트를 사용했다. 시청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6N2P/테트로드
2) 6N2P/펜토드
3) 12AX7/테트로드
4) 12AX7/펜토드
참고로 시청에는 두 개의 트랙을 사용해서, 각각 비교해봤다.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 카라얀 지휘
-다이애나 크롤 템테이션
1) 6N2P/테트로드
우선 1)부터 살펴보자. 베토벤의 경우, 우선 스피커 장악 능력이 눈에 띤다. 물론 아큐톤 계열의 스피커들이 진공관 친화적이기는 하지만, EL34를 쓴 인티 앰프 정도로 울릴까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 부분에선 별 무리가 없다.
그 음을 들어보면, 상당히 대역이 넓고, 반응이 빠르다. 하지만 진공관 앰프의 매력도 잘 살아있어서, 너무 밝거나 쨍하지 않은 가운데, 일종의 고풍스런 맛도 있다. 약간 음영이 깃들면서, 깊이가 있다. LP를 듣는 듯한 자연스러움도 있다.
이어서 크롤을 들어보면, 보컬이 약간 두툼하면서, 적당한 살집이 돋보인다. 음에 기(氣)가 들었다고나 할까? 당당하고, 심지가 곧다. 결코 허투루, 대충 내는 음이 아니다. 약간 어두운 듯한 느낌도 든다. 드럼의 타격감이 뛰어나고, 베이스라인도 풍부한 편이다. 중간에 피아노에서 올갠으로 바꿔 연주할 때, 분위기가 싹 바뀌는 대목도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전체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는 재생음이다.
2) 6N2P/펜토드
이제 2)로 넘어가보자. 아무래도 출력이 증가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음이 나온다. 카라얀의 경우, 좀 더 스피커를 움켜쥐고 흔든다는 느낌이 확 다가온다. 악단 전체가 힘이 넘치고 또 단호하다. 분해능도 좀 더 좋아진 느낌이다. 그러나 맛이랄까, 음색이랄까, 이 부분에선 약간 엷은 경향도 있다. 그래도 대편성 곡을 들을 땐, 이런 시원시원한 재생음이 더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크롤로 가보면, 더블 베이스가 좀 더 밑으로 뻗고, 보컬의 경우 약간 살집이 빠져서 보다 슬림한 느낌을 준다. 기타는 명징하고, 빠르며, 드럼의 타격감도 강력하다. 공간감을 표현하는 대목도 괜찮다. 단, 너무 힘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롤 특유의 매력은 1)보다 좀 줄어든 느낌도 있다. 소편성의 곡에서, 아기자기한 느낌을 받고자 한다면, 1)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3) 12AX7/테트로드
3)으로 넘어가면, 관이 교체된 만큼, 그 차이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좀 더 밝아졌다고나 할까? 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성향이 나온다. 카라얀의 경우, 고역이 좀 더 매끈하고, 화사하며, 저역은 풍부한 편이다. 분해능도 좀 더 좋아진 느낌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흔히 들었던 음과 통하는 바도 있다. 아무래도 진공관 앰프의 경우, 12AX7을 주로 들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크롤을 들어보면, 우리가 흔히 하이엔드라 부르는, 뛰어난 해상도와 다이내믹스 그리고 잘 다듬어진 밸런스 등을 두루두루 맛볼 수 있다. 베이스라인은 또렷하고, 보컬엔 일종의 섹시한 매력도 담겨있다. 밝아진 만큼, 젊어진 느낌도 있다. 기타 역시 예쁘게 다가와, 이전 시청과 확실히 대비가 된다.
4) 12AX7/펜토드
마지막으로 4)로 넘어가보자. 우선 카라얀을 들으면, 좀 더 박력이 넘치는 재생이 이뤄지고 있다. 고역은 힘차게 위로 뻗고, 저역의 펀치력도 인상적이다. EL34의 가능성을 활짝 만개한 인상이다. 특히, 다양한 악기들이 오소독스하게 엮이면서, 멋진 컴비네이션을 발휘하는데, 상당히 와이드하면서, 빠르다. 일체 머뭇거림이 없다.
한편 크롤을 들어보면, 베이스라인이 좀 더 탄력이 넘치고, 양감도 살아난다. 드럼의 타격감도 상당하다. 보컬은 힘이 좀 넘쳐서 너무 근육질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될 정도. 피아노와 기타는 선명하면서 존재감이 강한 만큼, 호소력도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에너지가 좀 과잉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그런 면에서 3)의 재생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전체적으로 일별해보면, 6N2P는 약간 어두우면서 고고한 음악성이 돋보이는 반면, 12AX7은 보편적인 밝고 개방적인 음이 매력적이다. 말하자면 국적이나 용도가 다른 만큼, 음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이 매우 재미있는데, 본 기를 구입한다면 한동안 비교 청취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하나의 앰프를 사서 무려 4개의 음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장점이 아닌가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음은 그 중에 무엇일까, 한번 탐험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