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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 하이파이클럽
간만에 KT88 소리를 들었다. 페즈오디오(Fezz Audio)라는 폴란드의 신생 제작사에서 지난해 선보인 ‘Titania’ 인티앰프였다. 초단 및 위상반전관에 12AX7, 출력관에 KT88을 채널당 2개씩 써서 8옴에서 45W를 얻는 지극히 모범적이고 검증된 설계의 진공관 인티앰프다. 가격도 착하고, 외관도 세련됐다. 그런데 함께 물린 아발론(Avalon) ‘Transcendent’ 스피커가 말 그대로 고분고분해졌다. 재생음이 완전 기대 이상이었던 것이다. 2014년에 설립돼 올해 고작 ‘4년차’가 된 이 신생 제작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KT150 진공관 대신 굳이 KT88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무엇보다 이렇게 음악성 가득한 재생음을 들려준 비결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신품 구매를 앞두고 몇날며칠을 고민했던 예전 유저의 입장으로 돌아가 찬찬히 들여다봤다.
"폴란드의 트랜스 장인 집안에서 만든 앰프"
페즈오디오가 폴란드 제작사라는 사실을 안 순간 필자는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을 느꼈다. DSD 재생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하이엔드 DAC 제작사 램피제이터(Lampizator), 지난해 리뷰를 하면서 몇번이고 감탄했던 멀티탭 제작사 기가와트(GigaWatt) 모두 폴란드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바르샤바가 수도인 동구권 국가 정도로만 여겨지는 폴란드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문화선진국이다. 퀴리 부인을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를 12명이나 배출했으나며 무엇보다 음악가 쇼팽과 과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조국이 바로 폴란드 아닌가.
페즈오디오는 토마슈(Tomasz), 마치에이(Maciej) 라코우스키(Lachowski) 두 형제가 지난 2014년 폴란드 키시에지노(Ksiezyno)에 설립했다. 키시에지노는 폴라드 북동부 비알리스토크(Bialystok)의 인근 소도시. 그런데 회사 탄생 과정이 흥미롭다. 회사를 설립하고 제품을 내놓은 게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첫 인티앰프가 2014년 2월 모스크바 오디오쇼에서 큰 호응을 얻자 이후 회사를 부랴부랴 설립했기 때문. 바로 EL34 진공관을 채널당 2개씩 쓴 인티앰프 ‘Laura’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 앰프는 모스크바 오디오쇼에 가지고 갔던 16대가 모두 즉석에서 팔렸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는 라코우스키 집안의 내공이 빛난 덕분이었다. 라코우스키 형제의 아버지는 ‘토로이디(Toroidy)’라는 패밀리기업을 통해 20여년 동안 폴란드에서 오디오용 트랜스포머를 제작해왔던 것이다. 이들이 만든 트랜스는 위에서 언급한 램피제이터를 비롯해 미국의 유명 DAC 제작사인 마이텍(Mytek), 폴란드 진공관 앰프 메이커 아마레 뮤지카(Amare Musica), 독일 진공관 앰프 메이커 오디오밸브(Audio Valve) 등에 공급되고 있을 정도로 성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다 싱글엔드 진공관 앰프에서도 포화되지 않고 제 실력을 낼 수 있는 출력트랜스를 개발, 일종의 ‘기술검증 모델’로 ‘Laura’를 만들어 모스크바로 날아갔던 것이다.
라코우스키 두 형제는 페즈오디오를 설립한 후 2015년에 ‘Laura’의 상용버전인 ‘Silver Luna’를 출시했고, 지난해 뮌헨오디오쇼에서 이번 시청기인 ‘Titania’를 데뷔시켰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내놓은 300B 싱글 구동의 ‘Mira Ceti’까지 현재 페즈오디오의 라인업은 이 3기종이 전부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내건 가격표. 유로화 기준으로 ‘Silver Luna Prestige’(2세대 버전)가 1700유로(220만원), ‘Titania’가 1950유로(256만원), ‘Mira Ceti’가 2350유로(300만원)에 그치고 있다. 이들이 ‘Titania’에 굳이 ‘KT88’을 채택한 결정적 이유도 이러한 ‘착한’ 가격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페즈오디오 최대 출력의 ‘Titania’의 탄생"
‘Silver Luna’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페즈오디오는 곧바로 출력이 더 높은 신형 인티앰프를 내놓았다. EL34를 채널당 2개씩 써서 푸쉬풀 구동하는 ‘Silver Luna’가 소리와 디자인 모두 좋았지만 출력이 35W로 대형 스피커를 울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 그래서 탄생한 것이 빔관 KT88을 역시 푸쉬풀 구동시켜 출력을 45W로 끌어올린 ‘Titania’다. 참고로 ‘Mira Ceti’는 8W. 한편 ’Silver Luna’가 달, ‘Titania’가 천왕성의 위성인 티타니아, ‘Mira Ceti’가 고래자리의 미라 항성을 뜻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Titania’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됐다. 섀시 높이가 비교적 낮은 편이어서 진공관과의 비율이 안정감 있고 보기에도 좋다. 유광 페인트 마감은 상당히 잘 된 편. 전면 패널에는 왼쪽이 볼륨 노브, 오른쪽이 입력단자 셀렉터 노브인 점이 특징이다. 후면에는 언밸런스(RCA) 입력단자가 3조만 갖춰져 있다. 그야말로 인티앰프의 핵심 기능만을 달았다. 심지어 리모컨과 진공관 커버까지 옵션으로 구매해야 할 정도다. 페즈오디오가 유럽에서 ‘블루컬러’를 위한 앰프라는 듣기 좋은 찬사를 받는 이유다.
위에서 보면 채널당 2개의 KT88 사이로 초단 및 위상반전관인 12AX7이 하나씩 박혀 있다. 푸쉬풀 구동이기 때문에 쌍삼극관인 12AX7이 초단 증폭 및 정위상과 역위상 신호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구조다. 이 경우에는 쌍삼극관에 들어간 2개의 삼극관을 리크 뮬라드(Leak Mullard) 회로로 결합시켜 한쪽 플레이트에서는 정위상 신호, 다른쪽 플레이트에서는 역위상 신호를 뽑아내는 게 보통이다. 어쨌든 ‘Titania’에 기본으로 들어간 12AX7 역시 일렉트로 하모닉스 제품이다. 물론 가성비를 고려한 결과로 보여진다. KT88과 12AX7 모두 페즈오디오에서 미리 바이어스 세팅을 하고 있는 점이 신뢰감을 준다.
그러면 왜 하필 KT88과 12AX7 조합일까. 우선 KT88은 1956년 GEC에서 처음 출시돼 이미 출력관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빔관이면서, 2,3년 전 텅솔에서 개발된 KT150에 비해 가격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Titania’에 투입된 KT88은 일렉트로 하모닉스 제품인데 현재 인터넷 판매가는 39.95달러(4만5000원). 이에 비해 텅솔 KT150의 경우 95.95달러(11만원), KT120만 해도 53.95달러(6만1000원)에 이른다. 더욱이 푸쉬풀이면 이들 진공관이 4개나 들어가기 때문에 제품단가는 더욱 올라간다. 이러한 가성비 때문에 KT88을 쓰게 됐다는 것은 제작사가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12AX7의 경우 전압증폭률(뮤. amplification factor)이 오디오용 쌍삼극관 중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이라 많은 오디오 브랜드에서 특히 KT88 푸쉬풀 출력관의 앞단에 즐겨 투입하고 있다. 초단의 전압증폭률이 어느 정도 높아야 출력관을 마음껏 드라이빙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AX7의 전압증폭률은 100인데 비해 12AT7은 60, 12AY7은 40, 12AU7은 17에 그친다. 물론 내부저항이 그만큼 높아(전압증폭률 = 내부저항 x 전류증폭률), 전원부 구성과 회로설계에 대한 제작사의 높은 안목과 제작솜씨가 요구된다.
이들 진공관 뒤로는 가운데 큼지막한 원형 커버에 전원트랜스, 양쪽 삼각형 커버에 좌우채널 출력트랜스가 들어가 있다. 이들 트랜스야말로 토로이디에서 전수받은 페즈오디오의 내공이 집약된 핵심 부품들이다. 특히 출력트랜스의 경우 진공관의 높은 임피던스를 최종적으로 낮춰주는 역할(스피커와의 임피던스 매칭) 뿐만 아니라, 푸쉬풀로 증폭된 두 신호를 합쳐주는 핵심 키맨의 역할까지 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이루 다 말 할 수 없다. 게다가 진공관 플레이트로 가는 고압의 B전압도 이 출력트랜스의 1차 코일을 지나가니 진공관 인티앰프나 파워앰프의 핵심 중 핵심이라 할 만하다.
‘Titania’의 내부를 보면 우선 파워서플라이는 대형 토로이달 전원트랜스 이후 솔리드 정류회로를 거쳐 ‘커패시터-초크코일-커패시터’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파이’형 평활회로로 짜여졌다. 평활회로에 쓰인 이 DC 리플 제거용 커패시터는 니치콘(Nichicon)의 뮤즈(Muse) 시리즈이며 정전용량은 770마이크로패럿에 달한다. 이밖에 전기선과 신호선 모두 하드와이어링 배선방식이며, 셀렉터 노브와 각 입력단자를 연결해주는 배선은 페즈오디오가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볼륨은 알프스(Alps) 특주품이다.
"시청"
시청에는 웨이버사의 네트워크 플레이어 겸 DAC ‘W DAC3 T’, 스피커에 아발론 ‘Transcendent’를 동원, 주로 나스(NAS)에 담긴 16비트, 24비트 PCM 음원을 플레이했다. ’Transcendent’는 1인치 세라믹 네오디뮴 트위터, 7인치 노멕스-케블라 복합 콘 우퍼를 2개 장착한 2웨이 3유닛 스피커로 감도 88dB, 공칭임피던스 4옴을 보여 구동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시청에 동원된 ‘Titania’는 오토 바이어스(auto-bias) 모델이다.
Andris Nelsons - Shostakovich Symphony No.5
Boston Symphony Orchestra
오호. 단박에 KT88의 남성적이고 호방한 사운드가 울려퍼진다. 매킨토시의 베스트셀러 ‘MC275’에서 느끼던 그런 묵직하고 선이 굵은 사운드다. 그렇다고 음끝이 뾰족하거나 거친 느낌은 조금도 없다. 이밖에 무대 안길이도 제법 잘 느껴지며 오케스트라의 바디감이 순간적으로 잘 구현된다. 팀파니의 연타도 타격감이 상당하다. 스피드도 만족스럽다. 그러면 여린 음에서는? 노이즈 관리가 잘 된 덕분인지 미세한 음들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붙잡아 오는 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는 온기가 전해지는 사운드이며 스케일이 옹색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그려진다. 콘서트홀을 꽉 채운 공기감마저 전해진다. 이 곡을 이 정도로 재현하면 사실상 게임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Arne Domnerus - Limehouse Blues
이 곡 특유의 소란스러운 현장감이 처음부터 잘 드러난다. 녹음된 상태를 빼놓지 않고 온전히 들려주고 있다는 반증이다. 기본적으로 ‘Titania’는 왜곡이나 착색이 없고, 스피드가 빠르며, 저역과 고역 양 사이드로 잘 뻗는 광대역 앰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게 다 출력트랜스의 우수한 물성 덕분일 것이다. 무엇보다 스피드와 저역의 양은 출력트랜스가 틀어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레이어는 이 가격대 앰프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다. 그럼에도 역시 아쉬운 것은 무대가 약간 평면적으로 그려진다는 것. 대형화면은 맞지만 안길이가 좀더 깊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비브라폰도 통통 영롱하게 잘 터지지만 약간 그 물방울이 굵고 질긴 느낌이 있다. 확실히 고운 EL34나 카랑카랑한 KT150, 쌉싸름한 6L6, 투명한 300B 소리는 아니다. 이게 KT88 진공관의 매력이기도 하다.
정보량이 많은 음원인데 빼곡하게 담긴 음들이 술술 터져나온다. 만돌린 악기의 세세한 아티큘레이션이 잘 드러난다. 생생하고 울림이 깊으며 잔향감이 좋은, 진공관 특유의 듣는 맛이 이 곡에서 유난히 쉽게 느껴진다. 맞다. 재생음이 헐벗지 않고 풍성한 것이다. 포커싱도 정중앙에 잘 잡혀 있어 아발론 스피커의 존재를 전혀 의식할 수가 없다. 이 곡에서도 굵고 호방하며 큼직큼직한 소릿결이 이어지지만, 노이즈 관리는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잘 돼 있다. 사운드스테이지도 제법 넓어 만돌린과 다른 소편성 오케스트라 악기들과의 앞뒤 거리도 잘 파악된다. 무른 저역 이런 아쉬움은 전혀 없다.
Turtle Creek Chorale - John Rutter Requiem Pie Jesu, Sanctus, Agnus Dei
Women’s Chorus of Dallas
‘Pie Jesu’에서 소프라노와 남녀 합창단이 일궈내는 무대가 참으로 그윽하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시청실에 낮게 깔리는 것을 보면 광대역 앰프에 광대역 스피커가 만났음이 분명하다. 홀톤과 잔향감은 깊고 풍부하며 풍윤하다. ‘Sanctus’에서는 챔발로가 한음 한음을 정확히, 분명한 포인트를 갖고 영롱하게 들려준다. ‘재생음에 영혼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Agnus Dei’는 약하게 살살 치는 팀파니 소리마저 모조리 긁어온다는 인상. 스테이지는 아주 홀로그래픽하지는 않지만 앞뒤 거리, 좌우 넓이가 적당히 느껴질 정도는 된다. 입자감이 곱고 온기가 있는 아발론 스피커 덕분이었을까. KT88 진공관을 쓴 ‘Titania’와 아발론의 ‘Transcendent’는 왠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Patricia Barber - My Girl, Summertime
A Distortion Of Love
기타의 핑거링이 생생하다. 패트리샤 바버는 바로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어지는 베이스의 연주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리얼하다. 계속 반복해서 느껴지는 것이지만 진공관 앰프의 노이즈 관리가 무척 잘 돼 있어 일렉 기타 사운드가 이날 따라 유난히 도드라진다. 줄이 곧 끊어질 것만 같을 정도로 매서운 아티큘레이션이다. ‘Summertime’에서는 퍼커션과 보컬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마이크를 거쳐 스피커로 듣는 게 아니라 그냥 육성과 현장 아날로그 연주음을 그대로 듣는 느낌이다. 스테이지 곳곳에서 여러 악기들이 출몰해 제 자리를 착실히 지키고 있다. 음들 사이사이가 점액질로 채워져 있다는 이 느낌은 진공관 앰프만이 줄 수 있을 것 같다. 쉐이커의 좌우 앞뒤 흔들림이 워낙 잘 느껴져 마치 한여름밤 논에서 삼지사방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 같게 들린다. 한마디로 입체적인 재생음이다.
"총평"
과문한 필자가 이번 페즈오디오의 ‘Titania’를 리뷰하면서 폴란드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됐다. 체코(KR오디오)도 그렇지만 폴란드(램피제이터), 불가리아(쓰랙스) 같은 동구권 국가들이 구 소련 시절 때부터 체득해온 진공관 및 트랜스포머와 관련된 제작 노하우가 상당한 것 같다. 페즈오디오도 예외는 아니다. 램피제이터의 ‘Golden Gate’나 마이텍의 ‘Manhattan’ 같은 하이엔드 DAC에 트랜스를 공급해온 가문의 내공을 모아 출력트랜스를 만들고 이를 자신있게 자사 앰프에 투입한 당연한 결과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값싼 KT88을 쓰는 등 착한 가격 정책을 내세우니 서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특한’ 제작사다. 더욱이 ‘Titania’의 경우 만듦새와 음질까지 잡았다. 과연 이들이 앞으로 또 어떤 앰프를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 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