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 [기어박스] 6억 5000의 가치, 골드문트 아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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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16-01-27 10:39 | 조회 : 6,53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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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자부심과 오만함은 같은 단어일지 모른다. 단지 시각(또는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 내가 아무리 자부심의 표현이라 우겨도 그 누군가에게는 단지 오만함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같은 맥락이랄까.
하이파이 오디오 중에서도 상위 클래스로 꼽히는 골드문트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오디오 제조사다. 골드문트 제품의 소유자 역시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그냥 오만함의 극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디자인, 직원들의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
적어도 그 소리를 직접 들어보기 전까진 그랬다.
금장 로고의 가치
골드문트는 창업자 중 한 명인 미셸 레바송의 주도 아래 프로젝트마다 최고의 기술과 능력을 갖춘 엔지니어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제품마다 개발 인력이 다르지만 골드문트가 지향하는 ‘원음 구현’이라는 원칙은 반드시 제품 출시마다 계승해 가야하는 불문율이다.
자사 품질 기준을 넘어설 정도로 개발하기 전에는 어떠한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케이스는 유명 브랜드 케이스를 가공하는 공장에서 정밀하게 만든다. 취급하는 브랜드는 단 3개. 인건비가 비싸지만 스위스 제네바에서 100% 제작한다.
최고급 브랜드에 걸맞은 뛰어난 성능, 이를 구현하기 위한 최신 기술, 꼼꼼한 제작 과정. 골드문트의 금장 로고 안에 숨어 있는 가치다. 물론 골드문트의 입장이다. 나에게는 그저 고집스러운 오만에 불과할 뿐.
골드문트의 오만함을 확인하러 청담동에 있는 오디오갤러리 플래그십 스토어로 향했다. 청음실은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도 있지만 청담동을 고른 건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모델이 있기 때문. 기왕이면 오만함의 끝을 봐야겠지.
6억 5000만원, 가장 비싼 오디오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모델. 원작인 아폴로그는 1988년 처음 출시됐다. 한 세트는 좌우 2조로 구성, 한 조에는 5개의 스피커가 모여있다. 당시 제품 디자인을 책임지던 이탈리아 화가이자 디자이너 클라우디오 로타 로리아의 디자인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전시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13년, 골드문트는 아폴로그를 다시 만들었다. 디자인은 그대로 재현하면서 그간 개발된 최신 기술을 모두 쏟아부었다. 원래 3웨이 패시브 방식이던 것을 6웨이 액티브로 개선했다. 6채널 1조당 3600W 출력을 내는 앰프도 집어넣었다.
는 메카니컬 그라운딩과 프로테우스 음향 기술을 비롯해 무선 전송 기능까지 넣었다. 무선의 경우 구성에 따라 블루투스를 사용할 수 있지만 기본은 와이파이다. 물론 하이파이 유저의 경우 무선 시스템에 그리 관심을 두진 않는다. 다만 설치 공간의 제약을 없애고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옵션을 제공한 것.
제품 제작 방식 또한 독특하다. 마치 최고급 자동차인 롤스로이스처럼 철저하게 오더 메이드 방식을 고수한다. 원하는 색상을 고른 다음 주문이 들어가면 스위스에서 제작에 돌입한다. 골드문트는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제작이 끝나면 본사의 엔지니어가 직접 방문해 설치한다. 인테리어나 가구 배치에 맞게 자리를 잡고 그 공간에 최적화된 소리로 사운드 튜닝을 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 25세트 한정판으로 제작하고 가격은 6억 5000만원. 현존하는 그 어떤 오디오 시스템보다 비싸다. 국내엔 3세트가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지는 음악
청음실은 비교적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4층에 자리잡고 있다. 프로로고스 청음 시스템과 메티스를 지나고 나서야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전용 청음실이 나온다. 유리창 하나 없이 밀폐된 공간이다. 24평 규모에 소파와 테이블 등 간단한 가구만 배치돼 있다. 일단 청음실에 들어서면 앞쪽에 흰색 스피커가 위용을 뽐내고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의 주인공 아폴로그 애니버서리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크다. 사람 키를 훌쩍 넘어설 정도. 5개의 스피커가 한 조를 이뤄 양옆에 자리한다. 일단 둘러보는 건 청음이 끝나고 해도 그만이다. 곧장 최적의 청음 위치를 뜻하는 스윗 스팟을 찾아 앉았다. Gary Karr의 Virtuoso Double Bass와 A. Vivaldi 사계 중 겨울 등 클래식과 오페라를 번갈아 들었다. 이런 시스템을 청음할 땐 가요를 잘 안 틀지만(솔직히 이런 초고가 하이파이 시스템을 구입하는 오디오 마니아가 대중가요를 들을리 만무 하지만) 따로 얘기해 빅뱅과 김광석의 노래도 들었다.
음악이 나오자마자 24평의 밀폐된 공간은 새로운 곳으로 바뀐다. 소리가 퍼지면서 주변의 벽이 점차 스튜디오로 바뀐듯한 느낌이다. 마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후반부에서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손을 잡고 뛰어갈 때 공간이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골드문트 = 오만함’이란 생각으로 가득했던 마음의 벽도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음량은 최대 출력의 60% 정도로 아직도 충분히 힘을 아끼고 있지만 넓은 공간을 꽉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눈을 감으니 한 그룹의 오케스트라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다. 녹음할 때 악기의 위치가 그대로 그려진다. 분명 스피커는 전면 좌우에 멀찌감치 서 있는데 바로 눈앞에서 연주자가 악기를 들고 연주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 느껴보는 공간감에 멍한 기분마저 든다. 아카펠라를 들을 때는 앞에 있는 벽 뒤에 가수들이 숨어 있지 않을까라는 오싹함마저 몰려오더라.
세밀한 소리까지 제대로 표현한다. 보컬과 각 악기의 소리도 명확하게 구분된다. 각 음역을 침범하지도 않는다. 어느 하나 뭉개지는 느낌 없이 선명하게 들린다. 그렇다고 따로 노는 느낌은 아니다. 철저히 분리된 듯하지만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특히 고음역에서도 부드럽게 감싸주어 듣는 이의 피로도를 줄인 부분이 마음에 든다.
평소에 듣던 음악도 전혀 새롭게 들린다. 숨어 있던 소리까지 명확히 구현하니 말이다. 비트가 강한 빅뱅의 노래를 들을 때는 거부감 없는 중저음과 보컬의 조화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고 김광석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들을 땐 1절도 끝나지 않았는데 울컥함이 올라왔다. 그만큼 단기간에 깊은 몰입감을 끌어낸다.
한동은 넋을 잃고 듣고 있자니 더워진다. 이제껏 체험해 보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감흥 탓이다. 세상 그 어떤 수식어도 이 제품을 표현할 순 없을 것 같다. 오만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골드문트의 철학과 근성을 귀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 든 확신이다.
오만함에서 자부심으로
그 감동을 나누고자 외장 마이크를 끼고 녹음을 하려 했다. 하지만 담당자가 기다려 달란다. 현장에서 바로 스위스에 있는 엔지니어에게 확인하더니 '녹음은 자제해 달라'는 양해를 구한다. 녹음 과정을 거치면 소리에 왜곡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다. 원음 구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골드문트 입장에선 반대할 수밖에. 솔직히 소리를 듣기 전에 이 얘기를 나눴다면 오만함에 기분이 나쁠 수 있었겠지만 소리를 듣고 난 후라 수긍이 갔다. 어차피 녹음을 해도 재생하는 기기의 한계로 그때의 감흥을 고스란히 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스피커 아래에 뻗어 있는 검은 부분이 메카니컬 그라운딩. 진동을 바닥으로 보내 소리의 왜곡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청음을 마치고 제품을 둘러봤다. 185x85x120cm의 제법 큼직한 덩치를 지녔다. 프레임도 생각보다 두껍다. 심플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디자인이다. 직육면체의 각 스피커 밑에는 바닥을 향해 있는 메카니컬 그라운딩이 보일 뿐 아무런 무늬도 없다. 신기하게도 골드문트의 금장 로고는 뒤쪽에 있다. 로고까지 뒤에 감춘 심플한 디자인. 소리에만 집중하려는 골드문트의 의도가 분명하다.
돌아오는 길,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려다 1초도 안 돼서 황급히 뺐다. 귓가에 맴도는 따뜻한 온기에 누가 찬물을 끼얹는다. 그 이어폰도 그리 저렴한 편은 아닌데 골드문트 앞에선 그냥 평범한 이어폰일 뿐이구나. 적잖이 귀를 버리고(?) 온 탓에 한동안은 음악 감상을 자제해야 할 판이다.
2014.05.16 / 한만혁기자